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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건축인사이드

스페인 건축 여행 어때요? '안토니 가우디' 다시 보기

 

안녕하세요. 한화건설입니다. 올해는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가 탄생한 지 165주년입니다. 가우디를 설명하는 다양한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20세기 미켈란젤로, 천재 건축가, 자연주의 건축의 거장, 건축의 시인, 건축 예술가 등이죠. 그래서 오늘은 가우디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대장장이의 아들

 

안토니 가우디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타라고나 지방의 소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온 대장장이였고 아버지는 구리 세공사였습니다. 가우디는 다섯 살 때부터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아 병약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많은 시간을 집과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죠. 어린 가우디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둘러싼 주변, 특히 자연을 섬세하게 관찰하면서 예리한 미의식과 독특한 상상력을 키우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의 조수가 되어 쇠망치를 두드리고 그릇 만드는 기술들을 익혔던 경험이 훗날 그의 건축물에 상당한 영감을 줍니다.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

 

17세가 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합니다. 졸업식 날 대학 학장은 가우디에게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최하위 점수로 건축사 학위를 주었다고 합니다.

1878 3, 대학을 갓 졸업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 건축 사무실을 열게 됩니다. 얼마 후 파리 만국박람회에 코메아 상점의 장갑 진열대를 출품하는데 이 일은 가우디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됩니다. 바로 평생의 후원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스페인의 유명 섬유회사 회장이자 백작이며 바르셀로나 시의원과 에스파냐 국회의원을 지낸 재력가 에우세비오 구엘(1846~1918)입니다. 가우디의 천재성을 간파한 구엘는 자신의 별장을 시작으로 가우디에게 많은 건축물을 의뢰했습니다. 시골 대장장이 아들에, 꼴찌로 대학을 졸업했던 풋내기 건축가는 구엘과의 만남이 발화점이 되어 이제 거장으로서의 치열한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가우디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백작(출처:http://www.barcelonas.com/eusebi-guell.html)

 

가우디의 건축물은 기괴하게 굽이치는 곡선, 다양한 자연을 형상화한 건축, 섬세하고 화려한 색감의 장식(또는 조각) 등이 특징입니다. 거침없는 상상력, 자유로움과 분방함이 돋보이는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소개하겠습니다.

 

곡선의 미학, 카사 밀라

 

카사 밀라는 가우디가 설계한 마지막 주택입니다. 1906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4년 후인 191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흡사 거대한 돌덩어리에 구멍을 뚫은 듯한 기괴한 외형 덕분에 스페인 사람들은 채석장이라는 뜻의 ‘라 페드레라’라고도 부릅니다. 완공 당시에는 말벌집, 고기파이 등이라고 불리며 당시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얀 석회암과 특이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카사 밀라는 가우디만의 독특한 곡선의 조형미가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가우디가 설계한 마지막 주택 까사 밀라의 외관 (사진:shutterstock. 이하 같은 출처)

 

까사 밀라 옥상 정원

 

출렁이는 파도를 형상화한 외벽은 물결치는 듯한 리듬감이 인상적이며 발코니의 철제 난간은 해초덩어리 모양으로 생동감이 넘칩니다. 흐르는 선은 외관뿐 아니라 각 층의 내부에도 이어져있는데 모서리가 없이 둥글둥글한 집 내부에서 입주자들이 어떻게 가구를 배치하고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특이하게도 가우디는 건물 중앙에 수직으로 큰 구멍을 두 개나 뚫었는데 이유는 환기와 채광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각 집에 닿는 빛의 흐름까지 계산해 그림자가 지기 쉬운 아래층에도 해가 넉넉하게 들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옥상은 크고 작은 조각품 하나하나도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했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했던 곳이입니다. 투구를 쓴 병사 같은 모양의 굴뚝과 환기구 수십 개가 세워져 있는데 ‘톱니 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몬세라도(Montserrat) 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곳의 굴뚝 형상은 영화 ‘스타워즈’ 속 캐릭터 스톰 트루퍼스의 모티브가 되었답니다.

 

영화 '스타워즈' 속 스톰 트루퍼스의 모티브가 된 굴뚝과 환기구 

 

자연에 순응한 건축, 구엘공원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약 14년이란 시간을 들여 만든 구엘 공원은 원래 상류층을 위한 전원 주택단지였습니다. 후원자였던 구엘이 영국에서 보았던 멋진 전원 주택 단지를 바르셀로나로 옮겨와 부유층에게 분양할 계획을 가지고 가우디에게 의뢰했습니다. 60여 가구로 조성한 이곳은 당시 경기 침체로 인해 가우디, 구엘, 구엘의 변호사 단 세 명에게만 분양되었고 결국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이곳을 사들여 개방형 공원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자연 친화적 형태로 설계된 구엘 공원외관

 

트렌카디스 기법이 돋보이는 구엘 공원 내부

 

구엘 공원은 특히 자연 친환적인 건물입니다. 설계 당시 구엘 공원은 경사가 심한 산이었습니다. 주택공사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죠. 그래서 가우디는 굴곡진 지형을 깎지 않고 그대로 살려 부지를 60개 구역으로 나누어 치밀하게 설계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돌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큰 나무가 구부정한 자세로 건물 안을 침범하여도 자르지 않는 자연 친화적인 건축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가우디만의 트렌카디스(Trencadis 기법은 구엘 공원에서는 정점을 찍습니다. 트렌카디스는 유리나 대리석, 에나멜이나 유약의 도자기 조각으로 만드는 모자이크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기존에 만들어진 유리나 도자기 등을 깬 후 그 패턴을 그대로 살려 다른 타일에 붙이는 방식입니다. 가우디가 자신의 조수인 주렙 마리아 주졸과 함께 최초로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원으로 통하는 계단 중간에 위치한 분수부터 벽, 다주실의 천장, 벤치에 이르기까지 구엘 공원 곳곳에서 트렌카디스 기법을 통한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미완성의 경이로움,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우디 필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외관. 첨탑은 열 두 제자를 상징하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사 중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혼이 담긴 건축물입니다. 성당은 1882년 착공되었습니다. 처음 설계는 교구 건축가가 맡았는데, 그가 1년 만에 사임하고 가우디가 2대 건축가로 임명됩니다. 당시 가우디는 31세였습니다. 이후 가우디는 74세로 사망할 때까지 43년 간 성당 건축 작업에 몰입합니다. 죽기 1년 전인 1925년에는 성당 지하 작업실로 거처를 옮기까지 했습니다.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성당은 신이 머무르는 곳으로 기도하는 장소이다. 영광된 빛이 성당 안의 색채를 밝게 비칠 것이다. 이 성당은 종교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넓게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가우디는 성당 전체를 ‘돌로 만들어진 성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가우디는 성당 전체를 '돌로 만들어진 성서'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구현하고자 한 성당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영광을 주제로 한 조각과 믿음, 소망, 사랑을 주제로 한 파사드, 열 두 제자를 상징하는 첨탑,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탑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우디가 완성한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 파사드와 지하 성당, 두 곳뿐입니다. 1926년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성당은 가우디가 죽은 지 100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지금도 계속 지어지고 있습니다.

 

파격, , 장인정신

 

생전에 가우디는 “새로운 것과 기괴한 것만을 쫓는 가우디의 노력은 천박하다”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우디는 탁월한 미적 감각과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건축을 예술의 경지, 상상력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평가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천재성과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꿈을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의 헌신과 희생을 반복했습니다. 그의 예술성은 언제나 고정관념을 벗어났고 자유분방하며 미래지향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자연 및 주변 환경과 철저하게 호흡하려 했고, 모든 건축물에 인간에 대한 배려를 담고자 했습니다.

가우디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요? ^^